
21대 대선 결과, 민주당의 이재명 후보가 당선됐다. 주지하다시피, 윤석열 쿠데타를 막아내고 조기 대선이라는 정치공간을 연 것은 ‘윤석열 퇴진 광장(이하 광장)’의 힘이었다.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를 계기로 한 촛불항쟁이 2017년 조기대선 국면을 열고, 촛불의 힘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것과 유사한 패턴이 이번에도 나타났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단지 ‘윤석열 퇴진·정권 교체’만을 외치지 않았다. 광장에 나온 시민들의 이야기를 분석한 <비상행동 시민발언문 분석팀 보고서>에 의하면, 시민들은 ‘민주주의 회복과 확장, 모두의 존엄과 평등, 노동, 생명·안전과 평화’를 말했다. 촛불정권을 자임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를 조금도 바꾸지 못한 문재인 정부의 전철이 반복되지 않기를 염원했다. 노동의 빈곤화,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지방소멸 위기, 기후위기, 돌봄위기, 그리고 생명·안전 위기라는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사회 대전환이 필요함을 외쳤다.
따라서 쿠데타 옹호 정당인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나 혐오정치를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는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는 그렇다 치더라도, 광장의 힘으로 집권 기회가 열린 이재명 후보는 광장의 목소리를 자신의 선거공약에 적극 반영해야 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광장의 목소리를 저버렸다.
민주당은 극우 발흥과 맞물려, 광장이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로 거론한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해 또다시 사회적 합의란 이름 하에 외면했다. 여성 공약도 대거 후퇴했다. 물론 용두사미로 끝났지만,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임한 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핵심공약에는 ‘성차별 해소’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여성 공약이 10대 공약에 아예 들지도 못했으며, 20대 대선시 민주당 공약이었던 ‘임신중지 건강보험 적용’도 없어졌다.
성평등과 여성이 삭제되었을 뿐 아니라, 농민도 노동도 삭제되었다. 지속가능한 농업과 식량주권, 먹거리 기본권 실현을 위한 농업 공약이 아예 없다. 노동 공약도 대폭 후퇴했다. 이 역시 온전히 지켜지지 않았지만,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의 1호 공약은 ‘일자리(공공부문에서의 81만개 일자리 창출, 노동시간 단축 통한 일자리 나누기, 비정규직 격차 완화)’였지만, 이번 대선의 1호 공약은 ‘AI 등 신산업 육성정책을 통한 경제강국’으로 대체됐다. 이미 민주당은 윤석열 탄핵정국에서도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조세정의 원칙을 무너뜨리며, 금융투자소득세 폐지에 합의하고 가상자산 과세 유예를 발표한 바 있다. 상속세 공제액 확대(배우자 과세 폐지)와 첨단전략산업 기업 법인세 감면 등 감세도 예고했다. TV토론에서도 부자증세는커녕 윤석열정부 시기 이뤄진 부자감세의 원상회복도 거부했다. 19대 대선 당시 민주당의 핵심 공약이었던 ‘재벌개혁’도 사라졌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가 발표한 '21대 대선 후보별 정책공약 가이드북'도 민주당의 노동정책이 작년 22대 총선 때보다 우경화됐음을 지적한다. 노조의 정책요구와 근접성을 나타내는 정책합치율이 42.3%를 기록해, 22대 총선시 정책합치율 60.9%에서 후퇴했다는 것이다. ‘노조법 2·3조 즉각 개정’에 대한 동의를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차별없는 임금' 영역에서 질의의 2/3에 '응답 유보'를 표명했으며,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성 인정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 도 수용하지 않았다. ‘△필수유지업무제도 폐지 △업무개시명령제도 폐지’도 마찬기자였다. '비정규직 정규직화 및 차별철폐'도 의지 없음이 확인되었다. 19대 대선 당시 최저임금 1만원 인상과 같은 최저임금 인상 공약도 물론 없다.
돌봄-복지 공약도 후퇴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돌봄서비스의 공공성을 높이기 위한 사회서비스원이 국정과제로 제시됐지만, 이번 대선 공약엔 없다. 국민연금 개혁이라는 두리뭉실한 공약만 있을 뿐, 소득대체율 인상도 빠졌다. 코로나19 때 사회적 이슈가 된 상병수당 도입 역시 공약에 포함되지 않았다.
기후공약은 어떨까? 민주당은 지난해 22대 총선에서는 2035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52%로 제시했는데, 대선 공약에는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달성하고 2035년 이후 감축 로드맵을 수립하겠다”고만 밝혀, 구체 수치는 사라졌다. 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전환 가속화를 얘기하고 있지만 공공재생에너지법 제정 등을 통한 공공성에 기반한 에너지 전환 관점이 부재하며, 탈핵 공약도 없다. 올초 무안공항 제주항공 참사에도 불구하고 가덕도 신공항 등 신공항 건설 폐지 공약도 없다. 산업전환 역시 산업경쟁력 강화 관점에서만 접근할 뿐, 폐쇄되는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의 총고용 보장같은 정의로운 전환의 관점에 근거한 공약도 없다.
민주당은 제 2호 공약으로 ‘내란극복과 민주주의 강국’을 내걸었다. 대통령 계엄권한에 대한 민주적 통제 강화,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 도입 등 긍정적 공약도 있지만, 민주당의 공약으로는 ‘민주주의 강국’을 결코 이룰 수 없다. 모든 노동자에게 노동3권을 보장하며, 집회·결사·정치활동의 자유를 온전히 보장하는 것, 모든 선출직 공직자에 대한 소환제와 국민발안제 같은 직접 민주주의제도의 도입, 노동자·민중의 다양한 목소리가 정치권에 반영될 수 있도록 표의 비례성을 담보하는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구성원이 존엄하고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약속도 없으니, 민주주의의 기초를 다지는 것도, 극우의 발흥의 토대를 없애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번 대선의 결과 탄생한 이재명 정부가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재연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 한국경제 침체를 빌미로 ‘중도보수정당’을 표방하며, ‘경제성장’을 제 1의 과제로 설정하면서, 19대 대선 때보다 우클릭하고 있어 더욱 그러하다.
이제는 노동자·민중투쟁을 민주당이 정치적으로 독점하는 시대를 끝내야 한다. 노동자·민중의 목소리를 외면해도 상대 정당의 실책으로 교대로 집권하는 기득권 양당의 적대적 공존이라는 한국정치의 병폐를 고쳐야 한다. 체제전환을 지향하는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이유가 이번 대선 결과로 더욱 절실해졌다.